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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책 | Posted by SARO2 2014. 4. 30. 16:40

새, 오정희

곰순이는 피아노도 없고 오락기도 없는 우리집에서 심심해하고 지루해하기도 한다. 저녁을 먹을 때도 라면 세 그릇이 놓인 밥상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집에서 좋은 걸 많이 먹어봐서 이런 건 못 먹겠다는 거니? 우린 엄마 아빠도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널 호강시킬 수 없어.
우리는 모른 체하고 우리끼리 맛있게 먹었다. 밥투정을 하면 밥을 굶기는 것이 상책이다.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곰순이가 이불 속에서 울었다. 배가 고프다고 했다.
시끄럽게 굴면 때려줄 테야. 내쫓을 테야. 난 시끄러운 걸 못 참아. 혈압이 오른다구.
나는 곰순이를 쥐어박았다. 곰순이는 소리내지 않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남의 집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구, 지긋지긋해. 정말 미치겠다구. 내 새끼들 시중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남의 새끼 치다꺼리로 골병들어야 하지?
나는 곰순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곰순이는 뻔뻔하게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렇게 빤히 보면 어쩌겠다는 거야? 니 눈깔이 나를 죽이고 말 거야.

수영을 하고 햄버거를 먹고 피자를 먹었다구?
우일이와 나는 하하 웃었다. 굴러다니는 토막연필과 크레용도 밥상에 흘린 라면 가닥도 넣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니 다른 바보들은 곰순이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바늘로 터진 배를 찬찬히 다시 꿰맸다. 곰순이가 아야아야, 우리가 무서워 조그맣게 울음 소리를 내었다.


우미의 삶이 요약되어 드러나기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생명이 없는 곰순이가 자신의 현실을 무시한다는 피해의식을 갖는 동시에 초라한 식탁에 있는 순간이나 맞는 순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곰순이에게 본인을 이입시킨다. 우미는 자신들을 무서워하던 어른이 되고, 그런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을 익히던 우미의 역할을 곰순이가 맡는다. 상처를 주면서 상처를 받는 광경을 우미의 입을 빌려 냉소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꽤 아프다. 몸은 자랐다. 행동도 어른스럽다. 그러나 그 안엔 어른을 따라하기 바쁜 그저 차가운 동심.

1교시는 수학, 2교시는 체육 ... 등 으로 매일 반복되는 일기는 우미의 일상이 되지 못한다. 곰순이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우미의 학교 생활은 책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학교를 다녀야한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행위의 모방에 불과해도 그 대상이 되는 어른마저도 현실 속에서 단 한명도 훌륭하지 못하고, 이에 어른이 되고싶다는 소망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무적 표현엔 괴리가 발생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본인을 존중해주었던 장선생 마저 우일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그의 개를 잡아먹은 후 죄책감에 사로잡혀 피하고 애정은 없었지만 닮았다고 우길 정도로 필요했던 어머니의 존재를 맡은 상담어머니도 결국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잘라내 파묻은 수많은 얼굴 중 하나로 전락해 얼굴마저 잊게 한다. 

마지막으로 동생 우일. 우일이 새가 되어 날아가기를 바랐던 건 본인보다도 누나인 우미가 아니었을까. 박제를 보고 충격받은 우일이 영혼을 버리는 동안 우미는 우일의 존재가 버거워져 연숙의 남편이 그리했듯 집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끝내 점점 무거워지는 새장을 어느 순간 버리고야 만다.

어른들로부터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새기고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 채 모방하던 우미가 처음으로 그들의 말을 깨닫게 되는 장면은 책의 마지막 장. 이 철길을 따라가면 세상 어느 곳으로라도 갈 수 있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렇게 떠난 아버지와, 연숙아줌마의 남편을 떠올리며 그도 그 길을 걷는다. 그러나. 우일아, 우미야.  그를 붙드는 엄마의 목소리. 연숙 아줌마는 한 번 생겨난 것은 없어지는 법이 없고 아주 훗날에라도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거라 말해주었다지. 열두살의 우미는 그렇게 겨우 한웅큼,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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